
여초에서는 틈만 나면 도는 떡밥인 정자은행

"정자은행을 도입하지 않는 걸 보니 한국 정부는 출생률 개선이 아닌 남자에게 여자를 보급하는 걸 원하는 게 틀림 없다!"에 좋아요가 하루만에 2100개 이상 박히기도 한다.
그럼 여기서 체크해봐야할 것
1. 정자은행을 도입하기 위해 넘어서야 할 장벽
2. 정자은행이 도입되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
3. 정자은행이 실제로 획기적인 저출산 정책인지에 대한 검증
세줄 요약
-정자은행 도입을 위해서는 생명윤리, 민법 기반 제도, 정책적 우선순위 등 무너뜨려야 하는 장벽이 많다.
-그렇게 도입해도 생겨날 사회적 문제가 많다.
-출산/출생 늘리는 데도 별로 도움 안 된다.
1.
먼저 생명윤리 문제
민간에서 정자로 장사를 하게 되면 정자는 철저히 '상품'이 됨. 상업용 정자은행은 필연적으로 기증자의 인종, 키, 학력, 직업, 외모, 병력 등에 따라 정자의 가격을 다르게 매김. 국가가 이를 합법화한다는 것은 인간의 유전적 형질에 등급을 매기고, 생명을 쇼핑하듯 고르는 반인륜적 시장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용인한다는 뜻이 됨.
만약 비혼 여성을 위해 '정자 매매'를 민간 장사로 합법화해 준다면, 당장 다음과 같은 논리에 반박할 명분이 사라짐.
"정자 매매가 합법인데, 왜 난자 매매는 안 되느냐?"
"정자와 난자 거래가 다 상업적으로 가능해지는데, 왜 대리모 장사는 불법이냐?"
다음은 정책적 우선도 문제
청년층의 주거 불안, 막대한 양육 및 사교육비, 노동 환경 등을 개선하는 정책, 혹은 아이를 간절히 원하지만 비용 문제로 고통받는 기혼 난임 부부들을 지원하는 정책에 쓸 자원을 빼서 정자 기증을 통한 비혼 출산을 지원하는 게 맞느냐?
이미 미혼모 가정이나 한부모 가정의 아이들을 지원하는 복지 예산조차 항상 부족한데, 인위적으로 한부모 가정을 양산하는 정책을 도입하는 것이 맞느냐?
2.
정자은행이 실제로 도입되어 운영될 때 발생하는 문제.
태어난 아이들의 생물학적 아버지에 대한 알 권리 문제
수입된 익명 기증자의 정자로 태어난 아이는 훗날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나 가족력, 유전적 질환 등을 추적하기 어려움. 아이의 알 권리를 차단하는 시스템을 장려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음.
다음은 생물학적 형제자매 양산으로 인한 문제.
상업 정자은행이 들어오면 이윤 극대화를 위해 이른바 스펙이 좋은 소수 기증자의 정자가 집중적으로 유통될 확률이 높음.

실제로 텔레그램 창립자 파벨 두로프는 자신의 생물학적 자식이 100명 이상이라고 밝힌 적 있음.
미국이나 유럽처럼 국토가 넓고 인구가 분산된 곳에서도 한 명의 기증자 정자로 수십 명, 혹은 세 자릿수의 아이가 태어나고, 이복 남매끼리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는 근친혼 문제까지 나타남.

실제로 해외에서는 정자 기증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정자 익명 기증 제도를 폐지하라고 국가에 소송을 걸기도 함
그 결과 영국, 캐나다, 호주, 스웨덴, 네덜란드 등에서는 정자 익명 기증 제도가 폐지됨. 영국, 캐나다, 호주 등은 여기에 정자 기증을 무보수로만 하도록 규제하기도 함.
3.
"한남 정자는 줘도 안 받고 외국 양남 정자는 양육비 문제 없지 않냐"
"아무튼 출생아 수가 늘면 좋은 거 아니냐"
"외국엔 있는데 한국에 도입된다고 뭐가 문제냐"
라고 할 수도 있어서, 실제 전체 연간 출생아 수 대비 정자기증 출생아 수 비율을 찾아봄.
미국이나 덴마크 등 생명윤리 규제가 제일 없는 경우 전체 출생아 수의 0.8~1.5%
영국, 호주, 캐나다 등 실명 무보수 기증 국가는 0.4~0.5%
실명 기증인 유럽 국가도 0.5% 내외.
영국이나 유럽의 경우, 기증을 몇 년 기다리다 지쳐 미국이나 덴마크에서 정자를 사오거나, 암거래를 해서 정자를 확보하기도 함.
덴마크에는 세계 최대의 정자 은행이 있는데, 자국 내에서 이용되는 비율은 1% 남짓이라고 함. 98~99%의 정자가 해외로 수출되는 것.
정부의 저출산 정책이 엇나가는 이유(조이고 댄스라던지, 가임기 여성 지도라던지) 국가가 '여성 배급'이라는 거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어서가 아님. 단순히 정책 입안자들이 과거의 '남성 생계부양자-여성 전업주부'라는 전통적 정상가족 모델의 경로의존성에 갇혀 있기 때문. 그들은 '무능'을 보일 뿐, 음모를 실행할 만큼 정교하지 않음.
저출산과 인구 소멸의 진짜 동인은 수도권으로의 자원 집중, 일자리의 극심한 이중구조, 살인적인 주거 비용 등 거시적인 경제·공간불평등과 같은 지리학적 문제임.
청년들이 생존을 위해 경쟁하느라 재생산을 포기하는 구조적 위기를 "국가가 여자들을 남자에게 배분하려 한다"는 성별 프레임으로 덮어버리면, 정작 해결해야 할 경제적 불평등이나 지역 쇠퇴 문제는 논의의 뒷전으로 밀려나게 됨.
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음
어차피 그들에게는 닿지 않을 공허한 외침이라는 걸 알긴 함
근데 저 스레드 글에 좋아요 수 찍히는 속도가 파멸적으로 빠른 거 보고 자괴감이 너무 심하게 들어서 공허한 외침이라도 해봄.
(이 글 쓰는 사이에 저 스레드 글 좋아요가 2200개 이상으로 늘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