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바닥 닦고, 테스터 정리하고, 가격표 맞추고, 상품 진열함 분명 어제 마감할 때 립스틱 테스터를 가지런히 놔뒀는데 오늘 보니까 세 개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누워 있음 매장에 야간 활동하는 뷰티 요정이 있는 게 확실함 그리고 꼭 오픈 3분 전에 발견함 이거 가격표 왜 다르지? 그 순간부터 전 직원이 바코드를 발굴하기 시작함 2. “저기요, 인터넷에서 봤는데요.” 이 말이 나오면 긴장해야 함 왜냐하면 그 인터넷이 공식몰인지, 블로그인지, 2018년 네이버 카페인지, 동남아 쇼핑몰 캡처인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임 고객님이 사진을 보여줌 화질이 144p임 브랜드명 없음 제품명 없음 케이스는 역광이라 검은색으로 보임 “이거 여기 있어요?” 크루는 웃으며 말함 “잠시만요, 비슷한 제품으로 찾아볼게요.” 속마음은 경찰도 이 단서로는 못 찾습니다 고객님... 하지만 어떻게든 찾아냄 3. “앱에는 재고 있다고 뜨는데요?” 전국 올리브영 크루 심박수를 단 한 문장으로 상승시키는 마법의 주문임 앱에는 ‘재고 있음’ 매대에는 없음 창고에도 없음 누가 들고 있는지 매장 한 바퀴 돌면서 확인함 마지막 한 개를 어떤 고객님이 장바구니에 넣은 채 마스크팩 코너에서 30분째 고민 중임 설명하기 애매함 “현재 다른 고객님께서 상품을 보고 계셔서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상 상품이 이 매장 안에 존재하기는 하나 저희가 물리적으로 확보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라는 양자역학적 답변임... 4. 밥 먹음 휴게실에 앉아서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 무전이 들림 “크루님, 혹시 색조 상담 가능하세요?” 입에 넣으려던 계란말이가 허공에서 멈춤 물론 쉬는 시간에는 안 나가도 됨 근데 동료가 혼자 뛰고 있다는 걸 알면 밥이 목구멍으로 안 넘어감 결국 계란말이 내려놓고 나감 고객님 피부톤 보고, 선호 색상 묻고, 발색 비교하고, 밀착력,지속력,광택감까지 설명함 추천받은 고객님이 말함 “아, 근데 인터넷으로 살게요.” “네 고객님~” 밝게 웃고 돌아옴 계란말이는 식어 있음 5. 섀도우 테스터가 깨져 있음 누가 깼는지는 모름 현장에는 반짝이 가루와 당황한 크루만 남아 있음 치우려고 다가가면 가루가 손에 묻고, 손을 털면 유니폼에 묻고, 유니폼을 털면 바닥에 묻음 10분 뒤 본인 얼굴까지 반짝거림 지나가던 고객님이 물어봄 “직원분이 바르신 하이라이터 뭐예요?” 6. 한 고객님이 향수를 시향하기 시작함 첫 번째: 상큼하네요. 두 번째: 포근하네요. 세 번째: 우디하네요. 네 번째부터는 코가 반응을 안함 “이 둘 중에 뭐가 더 달달해요?” 크루는 시향지를 맡음 아무 냄새도 안 남 후각 수용체들이 단체로 사직서 제출한 상태임 그래도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말함 “왼쪽이 조금 더 부드럽고 달콤한 느낌이에요.” 사실 왼쪽이 어느 쪽인지도 순간 헷갈림 7. 학교 끝난 학생들, 퇴근한 직장인들, 세일 소식을 들은 인류가 한꺼번에 입장함 계산대 줄이 길어지고 무전기에서는 동시에 네 명이 나를 찾음 “계산 지원 부탁드려요.” “창고 재고 확인 가능하세요?” “향수 케이스 열어주세요.” “고객님께서 선크림 문의하세요.” 내 몸은 하나인데 매장에서는 최소 4명의 내가 필요함 립 코너 갔다가 계산대로 뛰고, 창고 갔다가 기초 코너로 복귀함 8. “봉투 필요하세요?” “아뇨.” 결제 끝남 고객님이 상품 세 개를 들고 잠시 침묵함 “…이거 어떻게 들고 가죠?” 크루와 고객이 서로를 바라봄 "...그냥 봉투 살께요.." 결국 봉투 추가 결제함 다음 고객님 “영수증은 버려주세요.” 버리려는 순간 “아 잠깐, 주세요.” 다시 드림 “아니다, 필요 없어요.” 9. 사람이 조금 줄어듦 크루들 눈빛에 희망이 생김 매대를 정리하고 삐뚤어진 상품을 앞으로 당김 이 행위를 ‘페이싱’이라고 하는데, 쉽게 말하면 상품들이 열 맞춰 서 있는 척하게 만드는 것임. 방금 정리한 립밤 코너를 고객님이 구경함 괜찮음 고객님이 상품 하나를 집음 괜찮음 다른 자리에 내려놓음 괜찮지 않음 하지만 웃으며 다시 정리함 10. 매장 스피커에서 마감 안내가 나옴 크루들은 속으로 기도함 제발 아무도 들어오지 마라 오늘만큼은 문과 운명이 하나가 되어 닫혀다오 그 순간 자동문이 열림 고객님 등장 “금방 볼게요.” 이 ‘금방’은 지구 시간 기준이 아님 고객님은 샴푸 성분표를 읽기 시작하고 두피 타입을 고민하고, 리뷰를 검색하고, 동행인과 가족회의를 진행함 크루들은 멀리서 미소 짓고 있음 아무도 재촉하지 않음 다만 전 직원의 영혼은 먼저 퇴근해 있을 뿐임 11. 포스 마감 쓰레기 정리 테스터 정돈 매대 복구 분실물 확인 유니폼을 갈아입고 거울을 봄 다크서클은 깊어졌고 손등에는 립 틴트 발색 자국이 열두 개 있음. 누가 보면 뷰티에 미친 사람 같지만 사실 절반은 고객님 테스트 도와드리다 묻은 거고 나머지 절반은 무슨 색인지 기억도 안 남 다 같이 퇴근하면서 말함 “오늘 진짜 힘들었다.” 그러고는 5초 뒤에 “아까 그 고객님 원하는 거 찾아드렸을 때 좋아하시더라.” “그 학생한테 추천한 틴트 잘 어울렸음.” “내일 신상 들어온대.” 이런 얘기함 힘들다고 욕하면서도 누가 만족해서 나가면 은근히 기분 좋고, 동료가 바쁘면 자기도 모르게 뛰어가고, 다시는 못 하겠다고 해놓고 다음 날 또 출근함 매장에서는 하루 종일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묻지만, 정작 크루들도 가끔은 누가 자기한테 그 말을 해주길 기다리는 중임 그래도 문 닫고 같이 나오는 동료가 있으면 오늘 하루도 어떻게든 끝난 것 같음 그리고 집 가는 길에 올리브영을 발견하면 본능적으로 진열 상태부터 확인함